해남의 땅끝마을을 돌아보고 강진을 넘어와서 다산초당에 들렸다.
강진이 자랑하는 다산초당은 만덕산에 자리하고 있다.
파란의 백과사전에서 다산초당을 안내하는 글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조선 실학의 대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1801년 겨울 강진으로 유배온 뒤
동문 밖 이곳 저곳에서 생활하다 외가인 해남 윤씨들의 도움으로
1808년부터 1817년까지 10년동안 머문 곳이 지금의 다산초당(茶山艸堂)이라 한다.
다산은 초당에 머물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명저를 펴내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면서 실학을 집대성하고,
또한 후학을 양성하는 대학자로서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가 옛 건물터에 중건, 현재에 이르고 있는 다산초당에는
초당과 함께 동암(東庵), 서암(西庵), 그리고 흑산도에 유배중인 둘째형 약전이 그리울 때 찾았다는 천일각 등의 건물 외에
서쪽 언덕 암석에 ‘정석(丁石)’이라는 다산이 직접 새겨 넣은 글자와
초당 바로 앞에 다산이 차를 다렸다는 청석(靑石·또는 茶=다조)이란 넓적한 돌이 있고,
초당 뒤편에는 약천(藥泉)이라는 조그마한 샘과 오른쪽에 연못이 축조되어 있다.
백련사를 먼저 갔다가 백련사에서 고갯길을 넘어서 다산초당을 갔다.
대나무를 엮어 세운 길이 너무 운치가 있다.
다산초당 가는 길에 천일각이 세워져 있다.
흑산도에 유배된 형과 가족들이 그리울 때 강진만을 보면서 마음을 달랬던 곳에
훗날 선생을 그리면 세운 누각이다.
천일각에서 강진만과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천일각에서 돌아가면 동암이다..
현판의 글들이 모두 의미가 있다.
다산동암은 다산선생의 친필이며 보정산방은 추사선생의 글씨를 모각한 것이라 한다.
동암 옆에 동백꽃이 피어있다. 그것도 겨우 몇송이가.............
그런데 그 몇송이도 차가운 날씨라서 그런지 꽃잎이 상한 모습이라 안스럽기만 하다.
나무에 홈을 파서 연못으로 물을 흐르게 배수로가 신기하다.
연못 속에 다산초당의 비경이라는 연지석가산이 만들어져 있다.
비다잉어가 놀고있는 연못에 하늘과 나무들이 잠겨 있다.
바로 곁에 다산초당이다.
다산초당이란 현판도 추사선생 친필을 모각한 것이라 한다.
다산초당 뒤의 바위에 정석이란 글이 있는데 다산선생이 직접 새겼다고 한다.
바로 곁에 서암이 있다.
제자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서암 앞으로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에 대나무로 엮어세운 울타리가
고고한 선비가 지나는 길을 무언 중에 알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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