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니 2시입니다.
헤어지기가 다들 서운한 모양입니다.
고인돌을 보러가나 고창읍성을 가나 저울질을 하다가
고창읍성을 돌아보자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고창읍성에 대한 안내는 한국관광공사의 소개를 대신합니다.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호국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
북문인 공북루 입구에 답성놀이를 하는 부녀자 조각이 보입니다.
답성(성밟기)놀이에 대한 소개도 한국관광공사에서 소개한 내용을 그대로 옮깁니다.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고 한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고창 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 부녀자들 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주는 이야기들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공북루 앞으로 반달 모양의 성곽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읍성의 입구는 성곽을 돌아가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돌로 쌓은 성곽인데도 반듯하기가 칼로 자른 듯한 모습입니다.
담쟁이덩굴이 성벽을 타고 자라고 있었습니다.
같은 성벽인데도 양지와 음지에 따라서 담쟁이덩굴이 비교가 되었습니다.
빛이 고운 쪽에 담쟁이덩굴은단풍이 들었지만 싱싱한 모습인데
그늘진 곳의 담쟁이덩굴은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모습입니다.
반달 모양의 성곽을 돌아서들어가니 공북루가 맞아줍니다.
성벽과 나란히 누각을 세우고 앞쪽으로 반달같은 모양의 성벽을 쌓아서 문을 보호한 것이
다른 곳에서 본 성문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안으로 들어와서 보는 공북루의 주춧돌 높이가 제각각입니다.
공북루를 들어서니 바로 옆에 옥(獄)이 있습니다.
집의 모양은 보통 기와집의 모습인데 글자가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 치고 있습니다.
옥이 있는 맞은편에는 성벽과 나란히 벚나무가 줄지어 자랍니다.
그 아래에 벤취가 있어 쉬고 있는 관광객이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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